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걷기를 삶의 철학과 사회의 문제와 결부시켜 이야기 할 수 있는 통찰력에 감탄하며..... 특히 내 개인적 취향인 산책(혹은 쏘다님)과, 그동안의 경험과 비스무리 한 점, 오늘 우리 사회에서의 문제와도 닿아있는 내용에 공감이 가는 부분 메모해 놓음. 21.Nov.2018
걷기의 인문학 中- 리베카 솔닛
.... 페미니즘이 개혁을 요구하고 이룩해온 곳은 주로 실내(가정, 직장, 학교, 정치조직)에서의 상호관계였다.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실용적, 문화적 목적에서 공공장소에 접근하는 것도 시골과 도시를 막론하고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자들에게는 이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폭행과 추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여자들이 경험하는 일상적 추행은 "우리 여자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상적 추행은 여자로 하여금 나의 역할 중에 성적 존재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 내가 남자에게 이용의 대상, 접근의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한다. 일상적 추행은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도록, 여자에게도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에 갈 권리가 있고, 안심한 상태로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중략....... 내가 이 부자유를 처음 확실하게 느낀 것은 캐럴라인 와이버그, 실비아 플래스와 같은 열아홉 살 때였다. .....중략... 예를 들면 어느 날 오후, 관광지인 피셔맨스워프 근처에서 멀쩡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역겨운 성적 제안들을 줄줄 늘어놓기에 돌아서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정말로 충격을 받은 듯 흠칫 놀라더니 나한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면서 나를 죽여버린다고 했다. 비슷한 일들을 수백 번 겪었지만 그 때의 일이 유독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죽여버린다는 말에 담긴 진심 때문이었다. 내가 밤에 나가면, 살아있을 권리, 자유로울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없어지는구나, 세상에는 생판 남인데도 내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내가 괴롭기를 바라는 것 같은 사람이 많구나, 성은 이렇게 금방 폭력이 되는구나, 이런 상황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나 말고는 거의 없구나 하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온갖 충고들이 쏟아졌다. 밤에 밖에 나가지 마라, 헐렁한 옷을 입어라, 모자를 쓰든지 머리를 짧게 잘라라, 남자처럼 하고 다녀라, 비싼 동네로 이사를 가라, 택시를 타라, 자동차를 사라, 혼자다니지 마라, 에스코트 해 줄 남자를 구해라, 현대판 그리스 돌벽. 현대판 아시리아 베일. 사회가 나의 자유를 지킬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행동과 남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충고들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자기가 왜 혼자가 아닌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르는 채 그런 보수적인 삶을 살고 있을 만큼 사회가 부과한 여자의 자리에 잘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 그들은 혼자 걷고 싶다는 마음을 이제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런 사실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략........
일상적 위협을 겪으면서, 그리고 몇 번 끔찍한 일도 겪게 되면서 나의 그 마음도 바뀌었다. 하지만 계속 한 동네에 살다보니 길거리의 위험 요소를 피해 다니는 기술을 늘었고, 나이가 들면서 표적이 되는 일도 덜해졌다. 요새 나와 행인들의 상호작용은 거의 항상 정중하다. 때로 즐거운 경우도 있다. 추행이 젊은 여자에게 집중되는 이유는 더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자기가 가진 권리에 대한 확신, 자기가 정한 경계에 대한 확신이 더 약해서인 것 같다.(그런 확신 없음이 순진함이나 수줍음이라는 형태로 표현됨으로써 종종 '아름다움'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내내 겪게 되는 추행은 인생의 한계를 배우는 교육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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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로 말했을 때는 뻔 한 진리지만, 두 발로 깨달았을 때는 의미심장한 진리다.
- 육체가 실제성의 기준이라면, 두 발로 읽는 것은 두 눈으로 읽는 것보다 실제적이다.
-미궁(maze) vs 미로(labyrinth) : 미궁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 미로는 길이 하나 뿐이어서 계속 걷다보면 목표점에 도달 가능한 것(목적으로 향하는 확고한 여정)
- 걷기는 곧 읽기이다.
-「산」 : 가장 높은 곳에서는 생물체가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지형 요소와 기후 요소로만 빚어진 세상, 하늘에 감싸인 앙상한 지상이 펼쳐진다. 지구를 통틀어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문턱 같은 곳, 영혼의 세계로 이어지는 곳이라고 간주되어 왔고, 그러면서 성스러운 의미들과 연결되어 왔다. 영혼의 세계는 공포를 안겨주는 경우는 있지만 악하고 해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 산을 흉측하고 사악한 공간으로 간주해 온 것은 유럽 기독교문화권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적 의미의 등산을 선도한 것이 유럽인들이라고는 해도, 그 현대적 의미의 등반이 생겨났던 데는 낭만주의가 자연숭배를 되찾은 정황이 있었다. 그리고, 자연 숭배는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다.
-앙리에트 당제빌(Henriette d'Angeville) 「나의 몽블랑 등정(Mon excursion au Mout-Blanc)」 :
---육체의 욕구가 사람마다 다르듯 영혼의 욕구도 사람마다 다르다. 예쁘고 귀여운 것들도 좋지만, 내가 그런 것들보다 좋아하는 것은 자연의 웅장한 풍경이다. 내가 몽블랑을 택한 것은 그때문이다.
---이렇게 등산을 계획할 때마다 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지는 이유는 이런저런 봉우리를 오른 최초의 여성이라는 시시한 명성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행복이 뒤따르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마이클 코언 「나지 않은 길 : 존 뷰어와 미국의 황무지(The Pathless Way : John Muir & the American Wildness)」 : 오지 취향은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특권, 곧 미국인 중에서 안락한 계급의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라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직접 깨닫게 된 일이 우리에게는 충격이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을 특정한 종류의 여가 활동이나 풍경취향과 동일시 하면서 다른 활동과 취향의 의미를 간과하는 점이 우려스럽기도 하다. 자연을 걷는 일은 특정한 전통의 표현일 수 있다. 특정한 전통을 보편적 경험이라고 오만할 때, 그 전통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즉 유럽 북부의 낭만주의 전통에 덜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연에 둔감한 사람들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배회와 도박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기대하고 있을 때가 결과가 나왔을 때보다 즐거울 가능성이 높다. 둘 다 소망은 확실하지만 성취는 불확실하다. 한발한발 내딛는 일이나 손에 쥔 카드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일도 둘 다 운을 시험하는 일이다.
-관광 그 자체가 보행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다. 관광은 언제나 아마추어적 활동, 곧 특별한 기술이나 특수한 장비가 필요없는 활동이자 여가시간을 이용해 시각적 호기심을 채우는 활동이었다. 호기심을 채우려면 순진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기꺼이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참여해야 하고, 기꺼이 탐험해야 하고, 남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일과 남들의 시선을 받는 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데, 요새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야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이 실은 천천히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는 다른 느낌(시간과 공간과 자극을 느끼는 다른 방식)일 뿐일 수도 있다.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 있다는 것은, 도시 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 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 관찰자의 상태(냉정한 상태, 대상에 거리를 둔 상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정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