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쭹-
2023. 5. 25. 13:35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후 좋아진 작가이다.
환경? 인권? 여성? 반핵? 무슨 말이라도 붙일 수 있는 운동가.
더불어 자신의 생각을 신뢰를 주는 문장으로 적어내려갈 수 있는 작가.
이번 책에는 그녀의 사진이 있어서 얼굴도 만날 수 있었는데, 멋지기까지! (이젠 늙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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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라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며 그 질감과 반영(反映)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 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기억이 없고, 미래는 정말로 어두운데 그것이야말로 미래로서는 최선의 형태이고, 우리는 결국에는 늘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는 다른 누구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주 필요하다고 느끼는 일이었다. 생각하는 것.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조용히 있는 것. 혼자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는, 모든 확장하고 반짝거리고 소리내는 것들은 증발했다. 그녀는 자못 엄숙한 기분을 느끼며 자기 자신으로 쪼그라들었다. 쐐기 모양을 한 어둠의 핵으로,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줄어들었다. 그녀는 계속 뜨개질을 했고, 계속 꼿꼿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 자기 자신을 느꼈으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떨어낸 자아는 더없이 기묘한 모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삶이 일순간 그렇게 가라 앉을 때, 경험의 폭은 무한해지는 것 같았다. ... 그 아래는 온통 캄캄하고, 온통 퍼져나가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우리는 간간이 수면으로 올라온다. 사람들은 그 모습으로 우리를 본다. 그녀의 수평선은 그녀의 무한인 것 같았다. (인용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트로이 왕의 딸 카산드라는 정확하게 예언할 줄 알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에 걸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치광이에 거짓말쟁이로 생각했고,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녀를 가둬두기도 했다. 나중에 아가멤논이 그녀를 전리품으로 데려가지만, 그녀는 결국 그가 살해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그동안 젠더 전쟁의 험난한 물결을 헤쳐오면서, 나는 줄곧 카산드라를 떠올렸다. 그런 전쟁에서 신뢰성이란 그야말로 기본이 되는 힘이고, 그 측면에서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다소 부족하다는 비난을 자주 받기 때문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이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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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철 카슨이 살충제의 위험을 경고한 기념비적 저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출간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히스테릭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책에는 카슨이 조사한 모든 내용이 꼼꼼하게 각주로 달려 있고, 지금에 와서는 그 책의 주장이 선구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 화학회사들은 기분이 나빴고,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말하자면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히스테리라는 단어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감정적으로 격한 상태를 뜻하는 그 현상이 몸속을 돌아다니는 자궁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상 남자들은 그 진단에서 면제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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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꺼내는 것, 말과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존중받게끔 만드는 것은 여전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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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지옥처럼, 침묵은 여러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는 말하기를 어렵게 만들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면의 억제, 자기의심, 억압, 혼란, 수치심, 말하면 행여 처벌이나 추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원을 둘러싼 다음 원은 기어이 말하고 나선 사람을 침묵시키려는 세력들이다. 창피를 주든, 괴롭히든, 죽음을 낳는 폭력까지 모함하여 노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든 해서 말이다. .... 마지막으로 제일 바깥을 둘러싼 원에는, 설령 이야기가 말해지고 화자가 직접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은 경우라도, 이야기와 화자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는 세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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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까지도, 여자가 남자의 비행에 관해서 뭔가 불편한 말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망상에 빠진 인간, 사악한 음모론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그저 재미일 뿐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징징대는 인간, 혹은 그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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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 ... 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을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명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인용 : 허먼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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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 신화의 여러 버전 중 가장 유명한 버전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된 것은 그녀가 아폴론과의 섹스를 거부함으로써 아폴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도 자기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신뢰성을 잃는 것이 연관된 일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이다.
특히 여자들이 억업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반응, 즉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라는 반응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에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영국에서 명명된 '래드(lad) 문화'는 페미니즘에 의해 남성의 권리가 훼손되고 있다고 여긴 젊은이들이 새롭게 남성성을 강조하며 방종과 성차별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 요즘 우리나라의 20대 남성 현상인가??? 30년전에?!!!!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있다. ....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판도라 신화에서 보통 강조하는 대목은 단지를(신들이 판도라에게 준 것은 사실 상자가 아니라 단지였다) 엶으로써 그 속에 들어 있던 온갖 재앙을 세상에 퍼뜨린 여자의 위험한 호기심이다.
그런가 하면 단지에 끝까지 남은 것, 즉 희망을 강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게 흥미로운 대목은, 아랍설화의 지니들과 마찬가지로, 판도라가 내보낸 힘들이 도로 상자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혜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는 두번 다시 무지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몇 고대 문화는 우리에게 온전한 인간성과 의식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브에게 고마워한다.) 한 번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여성 유명인사들의 육체와 사생활을 순찰하면서 쉴 새 없이 트집을 잡는 타블로이드들이 있다. 너무 뚱뚱하다느니, 너무 말랐다느니, 너무 섹시하다느니, 너무 안 섹시하다느니, 너무 오래 독신이라느니, 아직 애를 안 낳았다느니, 애를 낳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느니, 애는 낳았지만 적절히 양육하지 못하고 있다느니..... 그러면서 그들은 모든 여성의 야심은 훌륭한 배우, 가수, 자유의 대변인, 모험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1986년에 작가 마리 시어(Marie Shear)가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 1848년에 뉴욕 쎄니커폴스에서 최초의 여권대회가 열렸을 때, 미국 독립선언서를 연상시키는 여권선언서에 서명했던 백명 중 서른두명은 남자였다. 그래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여자들의 문제로 여겨졌다.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 혐오는 피해자들만 나서서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 점을 이해한 남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계략이 아니라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라는 점도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