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넘게 못 보던 친구를 만났다.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내가 늘 그렇듯, 오랫만에 갑작스럽게, 그래서 더욱 반갑게 친구를 바라본다.
시시콜콜한 것들을 재잘거리며 얼마전 속상했던 얘기도 비밀스럽게 털어놓고, 재작년 추워질 무렵 우리집에 놀러왔던 얘기도 깔깔거리며 떠들었다.
그러다 그때 내게 빌려갔다며 책을 내어오더니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남미가 배경인 소설 두 권을 빌려준단다. 너도 나도 남미 참 좋아하지!
너에게 내 남미 얘기를 해줄 때 반짝였던 눈빛이 기억나 선뜻 가져왔다. 잘 읽을게!
그런데 참, 불륜과 남미라니!
십여년도 전, 비슷비슷한 내용에 더이상 안 읽겠다 선언했던 일본소설이다ㅎㅎㅎ
요즘 너무 비문학에만 빠져 있어서 환기할 겸 읽어 보았다.
작가가 작품을 목적으로 남미 여행을 하며 쓴 단편집.
목표로 하면 작품이 쓰여진다고?!!
부럽.....ㅠㅠ
괜찮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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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화
나는....어두컴컴하고 조용한 방에 홀로 방치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잠든 그 곁에만 있어도 즐거우리라.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늘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겉으로는 어른이지만 실은 모두 어린애인, 흔히 있는 얘기였다.
특히 현대에는 연애나 결혼이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2. 마지막 날
나는 전혀 불륜 체질이 아니었다. 자기 체질이 아니라는 것은 해보지 않고서는 잘 모른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방금 전까지 똑같은 맛의 커피를 마셨고.....얘기를 나눴는데, 지금은 없다. 아까 틀어놓은 CD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연락을 취할 수도 없다. 이런 상태는 죽음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양복이란 멋지게 보이거나 반듯하게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니라 공적인 장소에서 일할 때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옷이었구나..... 비로소 옷이란 사람이 필요해서 입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멋지게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멋지기 때문일 뿐, 옷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안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새하얘진다.
3. 조그만 어둠
거리는 그대로 있는데, 살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후의 그 정적. 지금도 당시의 활기가 냄새처럼 떠다니는 돌의 거리.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곳에서는, 죽은 사람이 아주 자연스레 되새겨졌다.
이곳에서 하염없이 거닐다 보면 죽은 자들의 세계와 경계가 없어져, 자연스럽게 저쪽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 아래서, 나는 한없이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4. 플라타너스
내 자양분이 될 쓸쓸한 빛이 빛나고 있다.
별은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거렸고, 공기는 베일 듯 맑았다.
5. 하치 하니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를 삼을 뿐이다.
6. 해시계
지금 슬프다면, 지금 그곳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7. 창밖
혼자가 아닌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고독을 까맣게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질 것은 자신의 목숨뿐, 늘 지니고 있는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데 혼자가 아니다. 이렇다 할 것 없는 가장 평범한 시간을 이렇게 공유할 수 있다.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의 인간은 아주 자연스럽다.
이 광경을 몇 번밖에 볼 수 없는 내 생명의 허망함을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