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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필로소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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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필로소픽

쭹- 2023. 6. 9. 15:51
유쾌하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
 우아함과 기품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안빈낙도의 방법을 제시해주는 책.
 모든 글귀가 다 맘에 들고 재밌었지만 인간의 한없는 능력인 미덕을 최후의 방법이라고 마무리해주는 마지막 장이 참으로 눈부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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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회적인 제한을 넘나들 수 있게 된 이후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부유한 삶이 현실적인 목표로 우리 코앞에 가까이 들이밀어질수록,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의 좌절감은 더욱 증대된다. 그런데 부를 좀 더 개인적으로 정의하면 비교적 쉽게 부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코스타 스메랄다의 집이나 페라리를 소유하는 것을 '부유하다'고 이해한다면 평생 가련한 녀석으로 지낼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러나 은행 예금액을 높이는 걸 포기하고서 가능한 한 많은 여가를 즐기고, 또 이 여가 시간에 나 자신을 돌볼 뿐 아니라 예를 들어 어딘가에서 명예직으로 종사하는 것을 부라고 일컫는 경우에는,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힘이 닿는 일에 내 자존심을 걸면 부자가 될 것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에 내 행복을 걸면 가난할 확률이 아주 높다.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훨씬 더 부유한 사람들의 그날에서 보냈으며, '다른 사람들의' 돈을 내 것으로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동안에는 불행했다.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이 아름답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마치 해방된 것 같았다. 부는 욕구의 문제이다. 이른바 우리의 욕구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우리 본래의 욕구를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누구나 부를 누릴 수 있다. 다만 광고 업계가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 조금 다를 뿐이다.

 
  매스컴을 통한 욕구의 생성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주창하는 교화서적을 통해 엄호사격을 받았다. 이 분야의 창시자는 다름 아닌 벤저민 프랭클린이었다. 자서전에서 프랭클린은 빈한한 양초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이 어떻게 미국의 이름 높은 정치가가 되었는지 묘사했다. 그 책의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기만적인) 핵심 논제는 누구에게나 그런 성공의 길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위한 유일한 전제 조건은 극기와 근면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성공을 구가하고 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마침내 성공에 이르는 길 Easy way to be successful>>, <<성공의 마법 Die Magie des Erfoleges>>, <<모든 것은 성취 가능하다 How To Get What You Want>> 같은 조언서는 절대적으로 성공을 보장한다. 이런 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저자들에게 말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칙'을 매혹적이게 하는 것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의 우여곡절을 받아들이고, 희생자의 역할에 파묻히는 대신 끝까지 행위하는 사람으로 남아있는 능력이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고 설파하는 서적들의 잘못된 점은, 행복의 진부한 상투어를 독자들 눈앞에 들이밀면서 이루지 못할 기대를 일깨워 불행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원래 어떤 삶이든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지하고 이루지 못할 꿈을 뒤쫓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기복, 존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영원한 건강, 갈등 없는 배우자 관계, 물질적인 소원의 성취를 뒤쫓는 사람보다 어쨌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많다. 게다가 경이롭게도 행복은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가족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극도로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찢어지게 가나나고 병들고 외로운데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원한 행복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확실하게 불행해진다는 거이다. 그리고 평생 물질적인 부만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단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드난 카쇼기는 자신이 돈을 쌓아두려고 한 게 아니라 돈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수중에 단 1센트도 없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사우디 왕의 주치의였는데도 아들을 전혀 도와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역에서 대학을 다니던 카쇼기는 결국 호주머니를 털어 최고급 양복을 사서 입고는, 뉴욕 시내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로비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수중에 남아 있던 최후의 50달러를 웨이터에게 팁으로 주었다. 그런 카쇼기의 모습이 어느 사업가의 눈길을 끌었다. 그 사업가는 잘 차려입은 아랍 젊은이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사교가적인 풍채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며 카쇼기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것은 아드난 카쇼기의 눈부신 경력의 시작이었다.
  심리학자들은 그런 행동 방식을 '역설적 개입'이라고 부른다.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태도에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언뜻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는 듯 보인다면, '역설적 개입'은 정석에서 벗어나는,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제3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로빈슨 크루소와 카쇼기와 호호슈테르비츠 사령관의 뛰어난 특징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탄하지 않고 끝까지 행위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꼭 필요한 것을 벗어나는 모든 비용은 사치이다"라고 말했다. 사치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만 구체적인 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꼭 필요한 것'을 규정하려 할 것인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정의를 내린 사람은 위대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만이 아니라, 최하층을 포함하여 모든 점잖은 사람들에게서 국가의 관습으로 보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들도 삶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엄밀하게 말해서 리넨 셔츠는 삶에 무조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리넨을 몰랐는데도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렵에서 점잖은 날품팔이꾼들은 리넨 셔츠를 입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1966년의 라디오와 1986년의 텔레비전, 그리고 2006년의 뭔가가 1776년의 리넨 셔츠에 해당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리넨 셔츠'는 생존에 무조건 필요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주변 환경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다.
 
  사치는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고 가져야 하는 모든 것은 포기하는 것"  카를 라슬로 <<사치를 위한 호소 Aufruf zum Luxus>> 1960sus
 
  삶을 보람 있게 해주는 것들은 수중의 돈이 감소한다고 해서 줄어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내적인 자주성은 지금까지 결코 수입의 문제가 아니었다. 박식함이나 예의범절도 마찬가지다
 
  정중함, 친절함, 다정함, 도와주려는 마음, 삶을 쾌적하게 해주는 이런 모든 것은 참으로 무한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여건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게다가 다행히도 인간의 모든 미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도덕률의 경우에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는 명령이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을 단념하고 저것을 회피하는 것으로써 그 명령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에 그치는 데 비해, 미덕은 무한하다는 불굴의 장점을 가진다. 사랑하거나 신뢰하거나 희망하는 데는 원래 한이 없는 법이다. 또한 누군가가 도를 넘어서서 현명하거나 용감하거나 정의롭거나 신중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결핍의 시대에 우리는 미덕만큼은 자책하지 않고 마음껏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에 오래전에 잊은 우리의 여러가지 능력을 다시 개발할 수 있다. 인간이 심각한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이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우리가 현재 처란 위기는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